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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이션 7

Salyut 7

82.61%
100% ·
7.2 ·
3.5



지금 여기서 감상

작품 정보

1985년 냉전 시대, 우주를 향한 국가간의 끝없는 경쟁이 펼쳐졌다.
소비에트 연방의 전유물인 살류트-7(Salyut-7) 우주 정거장이 궤도를 이탈하게 되고, 제어할 수 없는 우주선에 도킹을 시도하기 위해 떠나는 블라디미르와 빅토르.
그들에게 인류 역사상 최대의 미션이 주어진다!

TIP. <히든 피겨스> 미국 NASA가 경계했던 바로 그 역사적인 우주 미션!

감독/출연

클림 시펜코
클림 시펜코
감독
블라디미르 브도비첸코프
블라디미르 브도비첸코프
파벨 데레비앙코
파벨 데레비앙코
마리야 미로노바
마리야 미로노바
리우보프 악세노바
리우보프 악세노바
나탈리아 쿠드리아쇼바
나탈리아 쿠드리아쇼바

키노라이츠 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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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리뷰
·3.0
한 명의 작은 인간이 왔지만, 오지 못한 인류도 있다

이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최근에 개봉한 <퍼스트맨>이 미국의 우주개발을 다루는 영화라면, 이 영화는 소련의 우주개발을 다룬다. 그 영화에서는 닐 암스트롱(라이언 고슬링)이 달에 갔지만, 이 영화에서는 블라디미르 표도로프 (블라디미르 브도비첸코프)가 정류장에 간다. 우주에 가는 목적이나 역사적 시기가 다른 이 두 영화가 같은 선상에서 비교되어야 하는 것은 공교로운 개봉 시기의 일치뿐만 아니라 냉전 중이던 두 나라가 우주개발프로그램을 대하는 상이한 태도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미국의 동맹국이기에 자칫하면 ‘미국’의 맥락으로 ‘소련’의 사건을 평가하게 될 수도 있다. 분명 객관적인 시선이 필요하다는 건 확실하다. 그러나 단언컨대 역사란 누가 기록하느냐에 따라 시선이 달라지므로 객관적인 시선이란 건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니 우리는 그들의 시선이 무엇인지를 그들의 관점에서 이해하려 노력해보자. 또한, 그 둘을 테이블 양쪽에 앉혀놓고 이야기를 나누어 보자. 따라서 이 영화를 비교하는 것에 감독의 이름은 불필요하다. 우리에게는 단지 ‘미국’과 ‘소련’이라는 국가의 이름만이 남는다. 미국과 소련의 영화가 자국의 모습과 사건을 다루는 모습은 각각 어떻게 다를까? 이것은 미국 영화와 소련 영화가 아니라, 미국이라는 국가와 소련이라는 국가를 엿볼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오지 못한 인류도 있다


두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했기에 인터넷이나 책을 뒤져보면 금세 결말을 알 수 있다. 미국의 닐 암스트롱은 달에 착륙할 것이고 소련의 블라디미르는 우주 정거장을 고칠 것이다. 그렇다면 영화는 무엇을 보여주어야 하는가. 우리는 매일 달을 보지만 달의 이면은 보지 못했다. 익히 알려진 것의 반대편, 우리가 달의 뒷모습을 모른다면 달의 뒷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더 흥미롭다. 마찬가지로 역사를 다루는 영화는 역사의 이면에 있는 것들을 우리에게 보여주게 된다. 그곳에는 우주에 나가본 이들만이 아는 진실이 숨어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영화라는 스크린의 우주로의 항해에 동참하게 된다. 우리들의 아폴로 11호는 그곳에 착륙해야만 한다.

<퍼스트맨>은 영화가 시작하면서 닐의 딸이 죽는 모습을 먼저 보여준다. 이것은 닐이 달에 가게 되는 계기가 된다. 생활비가 당장 급한 그는 우주 탐사 프로그램에 참석해 훈련을 받게 되고, 그 과정에서 많은 사고로 동료를 떠나보낸 후 마침내 달에 발을 내딛게 된다. 말하자면 닐이 달에 발을 내디디며 말한 “한 명의 인간에게는 작은 발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커다란 도약이다.”라는 말은 다음과 같이 바꾸어 쓰인다. “한 명의 작은 인간이 왔지만, 오지 못한 인류도 있다.” 이때 인류라는 단어에는 그가 지구에 남겨놓고 온 모든 이들과 불의의 사고로 떠나보낸 자신의 딸과 동료를 포함한다. 결국 이 달이라는 것은 여태까지 그가 알고 지내는, 스쳐 보낸 모든 이들을 포함하는 개념이 된다. 우리가 인지할 수도 없고 인지하지 않아야 할 수도 있는 이곳은, 지우고 싶거나 지워야만 하는 고통스러움이 잠들게 되는 곳인 셈이다.

“한 명의 작은 인간이 왔지만, 오지 못한 인류도 있다.”라는 문구가 이 영화 전반에 스며들어 있다. 이 영화에서 NASA(미항공우주국) 관계자들은 우주비행사들의 죽음을 애도하고 또 살리려고 노력하지만 결국에 그들이 소모품이라는 사실은 변치 않는다. 시민과 국회의원들은 돈이나 잡아먹는 아폴로 프로젝트를 중단하라며 우주비행사들의 죽음을 이유로 들지만, 사실은 자신의 세금이 하늘에서 터지는 게 아까울 뿐이다. 말하자면 이 영화에서 비행사의 죽음을 진정으로 애도하는 것은 그들 스스로 즉 우주비행사밖에 없다. 이 폐쇄적인 애도의 모습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 죽음은 흡사, 메르스 환자 격리 병동처럼 NASA 안에서만 맴도는 (보안이라는 이름 하에) ‘검열된’ 바이러스인 듯 보인다. 그들이 달에 다녀와서 행여나 있을 우주 바이러스에 검역을 받았지만, 진정한 바이러스는 우리의 눈에 필터링 되지 못하고 그들의 몸속에서 여전히 남아있을 것이다.

닐은 왜 달에 가야 했을까


<퍼스트맨>이 관심 있는 건 아폴로 11호의 역사적 순간이 아니라 자식을 잃은 아비가 직장에서 겪는 모험담이다. 닐은 술도 마시고 화도 내지만 다른 동료들이 죽을 때 홀로 살아남아 결국에는 달을 거머쥐게 된다. 이것은 분명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영화 같은 상황(실화)를 보면서도 그가 주인공이기에 술술 일이 풀리는 것은 아닐까 하고 의심하게 된다. 말하자면 결론이 아니라 과정으로써 그를 평가하게 된다. 이 영화를 보는 동안만큼은 ‘달에 간 최초의 사람’이 아니라 ‘달에 가게 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닐이 왜 달에 가야 했는지를 생각해볼수록 점점 미궁에 빠지게 된다. 이것은 역사적 사실에 관한 물음이 아니다.

역사적 사실과 역사적 사실에 다다르는 과정은 다르다. 이것은 시작부터 결론(역사적 사실)을 지닌 영화가 택할 수 있는 차선책이다. 영화의 사실성을 살리면서도 허구를 가미하려면 결론은 살아남아야 한다. 즉 우리는 영화가 보여주는 허구에 물음을 던져야만 한다. 이 영화는 결론을 말하려 왜 이런 전개를 보여주었는가. 뻔한 결과임에도 그 실현과정에 의구심을 품게 되는 우리의 모습은 흡사 교과서가 왜 교과서인지에 물음을 던지는 것과 같다. 우리는 그 종이에 적힌 사실들이 정말로 사실일지를 한 번쯤 물어본 적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기록이기에 사실일 것이라며 믿어 의심치 않았다. 마찬가지로 이 영화에서 우리는 아폴로 11호가 인류 최초의 달착륙을 했다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그 신화의 주인공인 닐 암스트롱의 모습이 ‘사실’일지를 의심해본 바는 없다. 나는 지금 인류가 달에 간 적이 없다는 음모론을 주장하려는 게 아니다. 그것은 정해진 결론이다. 단지, 닐 암스트롱은 달에 갔다는 짤막한 한 줄의 설명과 “인류에게는 큰 도약.”이라는 명언이 첨가되는 ‘이야기’를 우리가 의심해본 적이 없다는 말을 하고 싶을 뿐이다. 닐은 달에 갔다. 말하자면 닐은 달이다. 그러나 달의 이면을 우리는 본적이 없다. 즉, 우리는 역사에 알려진 닐의 ‘반쪽’에 관해 아는 바가 없다.

달의 이면에 무언가 잠들어 있다. <트랜스포머>처럼 디셉티콘 군단이 있는 게 아니다. 그곳에는 우리가 잊고 지낸 삶의 이면이 있다. 또는 영화로의 번안작업을 거쳐 ‘영화의 이면’이 있다. 우리가 살면서 기억 속 어딘가로 떠나보내는 그것들은 달의 뒤편에 잠들어 있다. 그래서 닐은 죽은 딸의 유품을 달에 묻어야만 했던 것이고 이제 그 딸은 더는 가슴을 슬프게 하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영화를 보고 밖에 나왔을 때 스크린 속의 인물이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이고 결말이 어떻게 될 것인지는 다음에 먹을 식사 생각에 밀려 쉽게 사라진다. 그러나 닐과는 다르게 자신의 의지에 따른 것은 아니다. 영화관 안은 우주처럼 어둡고 깜깜하고 ‘꿈꾸는 것만’ 같다는 점에서 비슷하지만, 그곳이 허구라는 것을 명백히 알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닐에게 닥친 것은 달 탐사라는 현실이자 딸의 죽임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만 원짜리 영상소비행위일 뿐이다. 두 시간여의 영상이 우리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짤막하게나마 현실로부터 도피할 수 있게 해주는 것뿐이다.


영화라는 삶의 이면

관객과 스크린의 관계를 ‘훔쳐보는 자’와 ‘보여지는 자’로 정의할 수 있다면, 우리 또한 우리의 마음을 ‘훔쳐본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무언가를 보며 눈물을 흘릴 때 우리는 그 눈물이 어디에서 비롯했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즉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다 알지 못한다. 이성과 감성이 분리되어 있고 머리로는 이해해도 마음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은 그것을 뒷받침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것임에도 우리의 마음을 훔쳐보게 된다. 이들은 달의 앞과 뒤처럼 평생 결합될 수 없는 ‘장소’이다. 말하자면 이성과 감성은 서로를 잘 모른다. 마찬가지로, 관객과 스크린은 서로를 잘 모른다. 그래서 서로를 들여다본다.

거시적으로 확대해보자. 우리는 ‘미국’이라는 이성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가. 자유주의, 자본주의, 서부개척, 이것들이 모여 만들어진 아폴로 11호의 몸체는 상징계를 넘어 스크린이라는 상상계를 향해간다. 그리고 그곳에는 우리 마음의 이면이 있다. 또는, 미국이라는 국가의 이면이 있다. 그들은 사람을 위하는 척하면서도 결국에는 돈의 논리에 지배된다. 세금이 아까워 우주프로그램을 중단하라는 말과 세금을 내려고 우주프로그램을 해야만 하는 이가 있다. 그들이 달에 첫발을 내딛으려 소모한 우주비행사의 죽음이 헛된 것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가 그들을 기억해야만 한다. 그러나 우주에는 죽음이 너무 많기에 모든 것을 기억할 수는 없다. (마치 미국이 돈이 많은 것처럼) 그래서 우리는 닐 암스트롱이라는 프로젝트의 유명인을 통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는 아폴로 프로젝트의 생존자이고 동료의 죽음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영화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감정을 눈이라는 영사기를 통해서 생각이라는 스크린에 투사한다. 그렇게 우리(영화)는 우리 곁에 스쳐 간 죽음을 스크린 위에 올려두게 된다. 어떠한 죽음이든 그 위에 있다. 배려의 죽음, 생각의 죽음, 사고의 죽음, 이성의 죽음. 이 모든 것은 공허한 우주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된다.

와야만 하는 인류

<스테이션 7>도 비슷한 맥락의 영화다. <퍼스트맨>이 “한 명의 작은 인간이 왔지만, 오지 못한 인류도 있다.”라고 말하는 영화라면 이 영화에는 “와야만 하는 인류”가 있다. 1985년 연락이 두절된 소련의 우주정거장 살류트 7호는 갈 곳 잃은 마음처럼 그냥 내버려두었다가는 지구에 추락할 위기에 처한다. 서방 세계 대표적으로 미국 언론은 이 우주선이 어디로 추락할지도 모르고 히로시마에 비견하는 피해가 발생할 것이라며 호들갑 떨어댄다. 통제력을 잃고 지구에 곧 추락하거나 혹은 미국에 나포되어 기술력이 유출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인 소련 방공군(미국의 NASA 역할도 수행)은 정거장을 ‘수리 또는 추락’시킬 인원을 파견한다. 이때 그들이 먼저 제안했던 것은 대기권에서 미사일로 요격하는 것, 그러나 파편이 주변 위성을 파괴할 것이라는 이유로 반대, 그리하여 어디로 튈 지모르는 불똥으로부터 인류를 구한다는 명목으로 불가능에 가까운 임무를 두 사람에게 준다.

이들은 인류를 보호한다는 명목하에 파견되었다. 이들이 오지 않는다면 아무쪼록 미사일로 요격되어 자국의 위성을 몰살시키거나 혹은 랜덤한 장소에 떨어져 민간에 피해를 줄 것이 확실하므로, 두 사람은 ‘와야만 한다’. 말하자면 ‘한 명의 작은 인간만이 필요할 뿐, 나머지는 올 필요가 없다’. 이들은 오지 못한 게 아니라 와서는 안 된다. 우주비행사는 그 자체로 귀중한 인적자원이기에, 또는 모든 사람의 생명은 그 자체로 소중하기에 최소한의 희생이 필요하다. 그래서 소련 군부는 둘 중 한 명을 죽여야만 하는 선택의 기로에 서며 희생양은 이미 딸아이가 있는 블라디미르가 된다. 빅토르(파벨 데레비앙코)는 곧 태어날 아이가 있기에 그것을 목격할 수 있도록 생존자로 지정된다.

이제 우리의 명제를 다시 한 번 짚어보자. 미국은 한 명의 작은 인간이 달에 왔다. 그곳은 닐 암스트롱이라는 남자의 이면이다. 반면 소련은 한 명의 작은 인간을 희생시켜야 한다. 산소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두 사람 모두 귀환선에 탑승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때 귀환 대상자로 지정되는 것은 ‘한 명의 작은 인간이 필요한’ 빅토르이다. 아직 아내의 배 속에 있고 곧 세상에 나오게 될 딸아이는 ‘한 명의 작은 인간’ 신생아이고 사실상 자식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자식 이외에 ‘나머지’의 삶은 필요가 없다. 부모란 그런 존재이다. 그러나 소련은 우주 정거장을 건설한 ‘부모’임에도 매정하게 버리려 한다. 그에게는 ‘마더 러시아’로서 인민들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기에 이 우주 정거장은 ‘희생’되어야 한다. 말하자면 이 우주 정거장은 ‘한 명의 작은 인간’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한 명의 작은 인간의 안에서 희생되는 한 명의 인간이 한 명의 작은 인간을 살리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한 명의 작은 인간을 살리는 이야기


이해를 위한 번역. 우주 정거장 안의 비행사가 동료의 딸을 살리는 이야기다. 우리는 우주 비행사가 살아 있음에도 귀환의 희망이 없다고, 정확하게는 근처를 지나가는 미국 우주 왕복선의 도움을 빌리기 싫다며 정거장 폭파를 지시하는 소련 군부를 ‘이해’할 수가 없다. 그건 마치 얄량한 자존심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순전히 냉전에 의한, 미국도 마찬가지였던, 하지만 최소한의 양심은 있었기에 비교불가.) 그러나 이 영화가 러시아에서 만들어졌고 그래서 자국의 이야기를 다룬다는 맥락으로 이해해보면 극히 자기 반성적인 성격에 해당한다. 그 누구도 해낼 것 같지 않던 극한의 임무를 관제탑의 지시를 ‘무시’하고 독자적으로 성공해낸 블라디미르를 찬양하는 선전영화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능력의 한계를 실험하는 영화도 아니다. 이해를 위한 반복. 이것은 ‘한 명의 작은 인간을 살리는 이야기’다.

미국의 닐 암스트롱이 우주에 가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면 이 영화에서 우주에 가야 하는 이유는 딱히 없다. 딸의 곰 인형을 우주에 가져가는 것으로 가족에 대한 애정이 간접적으로 제시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퍼스트맨>처럼 전면에 드러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 영화는 배 위에서 낚시하던 두 사람이 갑작스레 불려가는 장면이 뜬금없을 정도로 국가의 부름에 충실하다. 미국이 ‘프로그램’이라는 이름으로 우주 비행사를 선발했다면 이 영화는 이미 ‘비행사’인 이들을 은퇴에서 현역으로 불러들이는 ‘의무’를 강조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의무’가 희생으로 변질되는 과정은 어딘가 모르게 동의하기 힘들다. 이 희생이 인류애에 근거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과연 어느 누가 자신의 목숨을 ‘불확실한 폭죽놀이’에 낭비하고 싶을까.

<퍼스트맨>이 달의 뒤편에 혹시나 있을 디셉티콘들을 찾아내는 이야기라면, <스테이션 7>은 달에는 안 간다. 그러나 이 영화는 달에 가지 않고 우주를 떠돈다는 점에서 더 공포스럽다. 달이라는 목적지가 명확하게 지정된 <퍼스트맨>과는 달리 이들은 어쩌면 영영 우주를 떠돌 수도 있는 것이다. 공허한 우주에서 적들은 찾아오지 않는다. 단지 외로운 자신의 얼굴이 상대가 되어줄 뿐이다. 얼어붙은 우주선의 모습과 접혀진 태양광 패널은 그런 공포를 더욱 강화한다. 어쩌면 스탠리 큐브릭이 HAL9000을 통해 차가운 목소리를 내리는 것 같기도 하다.



영화라는 스크린의 우주를 향한 항해

이 공포를 위에서 말한 ‘영화라는 스크린의 우주를 향한 항해’에 비유해본다면 이들은 바다 한복판을 헤매는 셈이다. 바다를 떠도는 이 난파선은 자신이 정착할 이면조차 찾지 못한 채로 우주를 떠돌고 있다. 닐 암스트롱은 자신의 딸을 묻을 곳이 달로 명확하게 지정되어 있었는데 반면 블라디미르에게는 지구에 있는 딸을 보관할 곳이 없다. 즉 그에게는 마음을 둘 곳이 없다. 더군다나 닐은 딸이 이미 죽었음을 알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달에 왔다면, 블라디미르는 갑작스럽게 결정된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이때 우리가 이상하게 여길 것은 국가를 위해서라면 군소리 없이 따르는 그의 헌신적인 태도가 아니라, ‘어디에’ 이면을 묻을지도 고민하는 태도를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이것은 마음을 둘 곳을 고민하기 이전에 마음이란 게 있는지에 관한 물음을 제기하게 한다. 소련이라는 나라는, 그들은 그들의 조국이 마음을 가진 인격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일까?

우리 곁에 스쳐간 죽음이 이 스크린 위에 있다. 이들은 거대한 죽음처럼 보이는 우주 한복판을 떠돌고 있다. 블라디미르와 빅토르는 정거장이 지구의 그림자에 들어가는 순간 온도가 급격하게 떨어지며 생존을 장담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들의 조국이 그림자의 영역보다 차가운 태도를 보여준다. 그런 차가운 시스템 속에서 따스함을 유지하는 것은 그들을 살리려는 센터장뿐이다. 그는 정거장을 요격해야만 하는 최후의 순간에야 그들에게 5일간의 일탈을 허락했던 것을 후회한다. 애초에 정거장을 살리지 않고 바다에 빠뜨렸다면 그들이 이 항해에서 길을 잃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이 스크린이라는 상상계에 빠진 이들의 영혼은 과연 제대로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인가? 어쩌면 이것이 영화라는 것을 미리 아는 것처럼 그들의 태도는 어딘가 모르게 체념적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따로 있다. 곧 태어날 아이를 밴 만삭의 부인을 가진 빅토르는 귀환에 필사적이다. 반면 이미 딸아이가 있는 블라디미르는 자신을 희생한다. 하나의 정거장을 위한 한 명의 희생이 제시되었고 이때 희생하는 쪽은 하나의 가족이 있는 한 명의 비행사이다. 말하자면 이들의 모습은 마치 이미 하나인 쪽이 하나이지 못한 쪽을 배려하는 것처럼 보인다. 자녀가 있어야만 가족이 된다는 통념은 낡았지만 아마도 전통적인 관점에서는 그러할 것인데, 이 영화에서 가족이 되지 못한 건 당연하게도 만삭의 부인을 앞둔 빅토르이다. 그는 아직 가족, 하나가 되지 못했고 그래서 하나가 되기 위해 지구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나, 블라디미르는 이곳에 남아 우주선 혹은 지구에 자신이 남겨두고 온 (그렇게 떠나지 말라고 화를 내었던) 아내와 자녀를 우주라는 상상계에 동일시하고 장렬한 죽음을 ‘맞이’하려 한다.


어떠한 죽음이든 그 위에 있다

배려의 죽음, 생각의 죽음, 사고의 죽음, 이성의 죽음. 그가 희생을 감수하는 건 배려와 생각과 사고와 이성이 일치하는 이 우주를 자신의 이면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닐이 지구와 달을 ‘기억하고 싶은 것’과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으로 나누었다면, 블라디미르의 분할은 조금 더 커서 지구와 우주라는 큰 범주에 적용된다. 어쩌면 개인을 중시하는 미국과 국가를 중시하는 소련이라는 이념적 대립처럼 보이기도 하는 이런 관점의 차이를 우리는 흥미롭게 여긴다. 왜냐하면 이것은 미국에 의해 쓰인 소련의 역사가 아니라, 러시아(소련)에 의해 쓰인 소련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분명 이 영화에서 구소련 시절의 향수를 맡았을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이름만 바뀌었을 뿐 속은 변하지 않았다는 증명이기도 하다. 하지만 무언가를 잊었거나 잊고 싶다는 점에서 이 두 영화의 테마는 일치한다.

차가운 감성(미국)과 차가운 이성(소련)이라는 이 두 가지 테마가 두 영화에서 반복됨을 우리는 이 글을 통해 알아보았다. 우주는 결코 따듯해질 수 없는지에 관한 의문이 들기도 하다만, 쉽게 다가갈 수 없다는 점에서 그곳은 결코 따듯해질 수 없는 듯하다. 더군다나 그곳이 스크린 안의 상상계라는 점에서 결코 따스해질 수는 없을 것이다. 스크린으로 객관화되는 우리의 몸과 마음이 과연 체온을 전할 수 있을까. 그곳은 달의 이면이자 지구의 이면, 지구를 제외한 모두가 우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니 ‘나’를 제외한 모든 것이 ‘타인’이라고 말했던 사르트르의 말이 떠오르기도 한다. 사르트르의 명제. “타인은 지옥이다.” 우리는 이것을 받아서 이렇게 고쳐 쓴다. “우주는 지옥이다.”

“우주는 지옥이다.” 미국의 닐은 지옥 같은 현실에서 탈출하려 우주로 향하는데 사실은 그곳이 지옥이다. 그래서 그는 지옥의 한복판에 자리 잡은 묘지에 딸의 흔적, 함께 했던 추억을 버리고 지구로 돌아온다. 그렇다면 영화의 마지막에 아크릴 칸막이를 사이에 두고 아내와 대화할 때 화색이 돌던 닐의 얼굴은 딸에 대한 상념을 잊었다는 증거이다. 초조해 하다가 아내와 대화할 때 밝아지던 그의 표정은 딸이 아니라 아내에게, 남겨진 가족에게 마음을 쏟게 되었다는 증거이다. 어찌 됐든 가끔은 달의 이면을 들여다볼 필요는 있을 것이다. 망자는 필연적으로 잊혀지만, 망자를 필연적으로 잊어야 하지만, 망자는 필연적으로 잊혀서는 안 된다.



손가락으로 달을 돌려보라

다시 말해 우리는, 마음에서 우러난 감정을 눈이라는 영사기를 통해서 생각이라는 스크린에 투사한다. 스크린의 이면에는 잊혀진 생각들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두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줄곧 생각해보아야 한다. 잊었던 것을 떠올려야 하므로.

따라서 역사를 다룬 영화는 필연적으로 인물을 소개하게 된다. 역사라는 거대한 흐름으로 기록된 교과서의 뒤편에는 그 글자 하나하나에 해당하는 어떤 이들의 숨결이 남아있다. 그런데 이들의 숨결을 느껴보는 것은 생전에 그들이 어떤 이였는지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본 이에게만 한정된다. 말하자면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이 역사의 난투극에서 살아남게 된다. 어떤 난투극인가. 역사를 자기 뜻대로 기록하려는 승자 혹은 패자 그 펜촉을 두고 벌어지는 정치게임이다. 무엇을 사랑하는 이들인가. 역사를 기록하는 행위에 앞서 역사의 산 증인들을 몸소 굽어살피기를 원하는 이들이다.

펜촉을 두고 벌어졌던 싸움은 오늘날에 이르러 미디어 리터러시(Media literacy)라는 용어로 변형되었다. 즉 우리는 그 자체로 역사의 산증인이 되었다. 우리는 스마트폰을 통해 하루하루 자신만의 역사를 생산해내는 중이다. 이쯤에서 빌려오는 스티브 잡스의 명언, 우리의 손가락은 가장 완벽한 필기도구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라는 관객은 이 역사를 다룬 영화를 ‘해석’하기에 가장 완벽한 ‘필기도구’이다. 우리는 이 영화를 보고 친구에게 한줄평을 보낼 것이며, 누군가는 블로그에 평론을 쓸 테고, 더 나아가 어느 예술가는 자신이 생각하는 역사를 영화로 만들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두 영화는 우리가 ‘역사’의 이면을 떠올리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 ‘영화’라는 삶의 이면으로 이어지도록 돕는다. 우리의 삶이 한 편의 영화라면, 우리의 삶이 먼 훗날에 역사가 된다면, 우리가 알지 못했던 것들은 역사의 ‘이면’으로 남겨질 것이므로 누군가에게는 증언의 도구가 될 것이고 또한 생각의 단초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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