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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은총으로

By the Grace of God

94.12%
96% ·
8 ·
3.7



지금 여기서 감상

작품 정보

행복한 가정을 꾸린 알렉상드르는 유년시절 자신에게 성적 학대를 저지른 프레나 신부가 여전히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는 소식에 큰 충격을 받는다. 알렉상드르와 같은 피해를 입은 프랑수아와 에마뉘엘은 더 이상의 고통을 막기 위해 ‘라 프롤 리베레(해방된 목소리)’라는 단체를 결성하고 교회에 프레나 신부의 파면을 요구한다. 하지만 교회는 공소시효를 내세우며 범죄를 은폐하려하는데…

예고편


감독/출연

프랑소와 오종
프랑소와 오종
감독
멜빌 푸포
멜빌 푸포
드니 메노셰
드니 메노셰
스완 아르라우드
스완 아르라우드
에릭 카라바카
에릭 카라바카
프랑소와 마르튜레
베르나르 베를리
베르나르 베를리
조시앙 발라스코
조시앙 발라스코

키노라이츠 지수

별로예요 6% 좋아요 94%

모든 리뷰
·4.0
텅 비어있는 자리의 은총으로

세상의 질문되지 않는 물음들을 바라본다. 태초에 어떤 오랜 약속이라도 오고간 듯 답하지 않고 흘러가는 시간들을 돌아본다. 프랑소와 오종의 '신의 이름으로'와 안소니 홉킨스와 조나단 프레이스가 주연, 지난 칸느에서 뜨거웠던 '두 교황'은 왜인지 비슷하게 개봉했고, 고작 스크린을 마주하고 묻지 못한 질문들을 마주한다. 어릴 적 학교에 입학하듯 성당에 다니기 시작해 베드로란 세례명을 얻었고, 중학교 무렵 정해진 의례처럼 거행되는 경진성사라는 걸 문턱에 두고 돌아선 뒤 그 시간은 중단이 되어버렸지만, 성당에 다니는 걸, 교회에 나가 기도를 하고 신앙 생활을 한다는 걸, 설명할 법이 내겐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신의 이름으로' 무화되어 버리는 것들. 용서와 참회로 지워지는 기억들. 그렇게 질문의 의미를 잃는 현실의 고작 이것과 저것이지만, 고달픈 현실이 마주한 종교 어느 문턱의 하늘은 사실 보이지 않는 균열을 숨기고 있는지 모른다. 페르난도 메이렐레스의 '두 교황'은 위엄이 깃든 시마르와 어꺠에 걸친 파샤르, 커다란 십자가를 손에 든 남자 너머 리옹 시가지의 모습을 비추고, 종교는 아마 그 어딘가의 높이, 하늘 가까운 곳에 자리하는 무언의 세계다. 성당 자리에 앉아 올려다보는 십자가, 그건 고작 2, 3미터 정도일지 모르지만, 실은 그보다 높은 어디, 숫자로 세워볼 수 없는 어느 곳의 하늘이 왜인지 이곳에 있는 것만 같다.

프랑소와 오종의 '신의 이름으로'는 가장 오종답지 않고, 가장 과격한 작품이다 .어릴 적 성당 캠프에서 신부에게 지속적인 성추행, 폭행, 괴롭힘을 당한 소년은 아이 다섯을 가진 평범한 중산층의 남자, 알렉산드로(멜빌 푸포)로 등장하고, 그만큼의 세월, 세상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교구 내 성직자, 추기경의 성추행, 이런 어울리지 않는 말들을 덜어내보면 ,아동을 상대로 성적인 범죄를 저지르는 건, 근래 이곳을 설명하는 가장 주요한 상처의 서사이다. 그리고 '성'이란 게 무언지, 피해자는 좀처럼 피해자이지 못한다. 수치심, 가족을 비롯 주변 사람들이 아파할 시간들, 그런 어김없이 현실의 이런저런 굴레는 상처난 '성'의 자리를 돌보지 못한다. 그리고 그런 '침묵'의 시간은, 참 얄궂게도 참회와 용서를 이야기하는 성경 구절, 아무도 마련해주지 않은 자리에 앉아 별 무리 없이 몇 십년을 버틴다. 오종의 '신의 은총으로'는 기도문 말미에 등장하는 '아멘'을 말하기 이전 신에 의지하는 한 마디이고, 영화는 이 말에 감쳐진 위선, 용서와 참회, 믿음으로 시종일관 묵묵부답했던 가해의 오랜 역사를 드러낸다. 사실 성서책만 들춰봐도 모순으로 점철된 자명한 사실들. 하지만 멀고도 가까운, 그곳엔 이곳을 바라보지 않는 너머의 세계가 있다. '신의 은총으로', 그 말은 사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무책임의 도돌이표일지 모른다.

'신의 은총으로'도, '두 교황'도 이전의 종교를 다룬 작품들과 대비되는 건 수평을 오가는 시선과 앵글의 반격이다. 종교의 위엄함, 고귀한 곳을 바라보는 성스러운 장면은 와인이 아닌 환타로 저녁을 먹고, 애플 워치의 인공지능 기능에 일어나 몇 걸음을 걷고, 어김없이 이곳에 흘러가는 종교의 현실은 사실 별반 다르지 않아 새롭게 진동한다. 교황이라는, 교리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위치하는, 신,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의 그 이름에, 보통 명사에나 붙는 숫자를 붙여 놓으면서, 영화는 이곳에 작동하는 종교를 생각한다. 하늘 너머 먼곳에 자리하지 않는 한, 땅을 딛고 살아가는 현실에 흘러가는 한, 종교가 부딪히는 수많은 문제들 앞에 종교는 무엇보다 무력하다. 믿음과 참회, '신의 은총이란' 말들은 구약을 건너 머나먼, 의미없는 시절의 짧은 외마디일 뿐이다. 소위 말해 시대착오적 현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다소 재미없게 피해자를 쫓아가던 오종의 영화가 마주하는 건, 끊임없이 부정하고 현실을 직시히고, 싸움과 단결로 문제를 해결하며 마주하는 건, 텅 비어버린 자리, '아직도 신을 믿으세요'란 또 한 번의 무력한 질문이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그곳에 가장 성스러운 장면이 태어난다. 부부간의 시간이 줄어들어 힘겹고, 다시 들춰낸 아픔에 여자 친구는 떠나가고, 힘겨운 싸움을 하고 돌아온 집엔 괴물같은 외로움이 덩그러니 남아있고. '두 교황'은 또 한 번의 새로운 교황의 선출을 알리고, '신의 은총으로'는 보이지 않는 어느 싸움 문턱에서 멈춰버리지만, 어쩌면 남아있는 건 하나, 알 수 없지만 자명한, 믿음으로 완전한 너머의 그곳일지 모른다. 오래 전 홀로 찾았던 파리에선, 노트르담 성당에 들어서자마자 굵은 눈물이 흘렀다 .어쩌면 그런 것. 영화는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지도, 어쩌면 어떤 도움도 주지 않는지 모르지만, 실패하고, 무너지고, 좌절하고, 그곳에 남아있는 무언가를 바라본다. 누군가 그게 무엇이냐 묻는다면, 나는 그저 내가 믿는 무엇이라 조용히 말하고 싶다 .


2개0개

·4.0
당신은 정말로 존재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간다. 사회적 약속이라는 거대한 구조적인 틀부터, 사랑과 우정 같은 관계의 뿌리 모두 믿음의 토대 위에서 자라났고, 자라난다. 인간의 감정과 행동이 그러한 믿음의 자그마한 흠 하나로도 손쉽게 좌우되기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그 흠이 한 인간의 삶을 완전히 붕괴시킬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는, 믿음의 결정체로서 유서 깊은 전통을 자랑하는 ‘당신’이 위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여지없이 절대적인 것이 존재한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겠으나, 그 절대적인 것에게 이면이 존재한다는 점도 부정할 수 없다. 그 이면에 서서 예외라는 가면을 쓰고 사탄도 고개를 가로저을 추악함을 저지르는 당신의 대리인들이 여지없이 존재한다. 믿음을 양분 삼아 이룩한 터에서, 그 믿음을 도구 삼아 그들은 억압과 폭력을 잉태하여 손을 뻗는다.

‘어린 양’이라는 당신의 언어가 원망스러워지는 순간이다. 손을 뻗는 순간에도, 뻗은 후에도 그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양의 목소리를 듣고도 그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양들이 연대하며 공감과 고통과 균열을 느낄 때도 그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이지 않고 움직여지지 않는 그들을 마주하며 이제 우리는 당연히 당신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허나 그들을 움직일 당신의 움직임 역시 보이지 않는다. 영향력은 있는데 영향이 미치지 않는 당신의 아이러니에 분노한다. 은총이 언제부터 방아쇠를 달고 있었는지 잘 모르겠다. 어두운 밤에도 당신의 터는 밝은 빛을 내뿜으며 저 높이 서있다. 그 높은 곳에서 당신은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까. 움직임이 없는 것도 당신의 뜻일까. 당신은 정말로 존재하고 있습니까?


1개0개

·4.0
침묵의 사슬을 깨라, 연대가 가진 힘의 크기

저 깊은 구덩이에 묻어 버린 진실도 언젠가는 드러나게 마련이다. 이 영화는 안타깝게도 실화다. 십수 년 동안 가톨릭 사제가 아이들을 망쳐왔다. 그리고 교구는 사실을 알면서도 함구했다. 교구도 같은 편이었다. 가장 안전한 집이라고 생각한 교회에서 일어난 끔찍한 일이다. 일명 ‘프레나 사건’으로 불이며 리옹 대교구 사제였던 ‘베르나르 프레나’신부가 1979년부터 91년까지 70여 명의 스카우트 아이들에게 성폭력을 가한 사건이다.

이는 가톨릭 국가 프랑스에서 매우 논쟁적인 문제였고, 상영 외압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걱정 없다. 자국 내에서도 가장 도발적인 감독 ‘프랑소아 오종’이 영화화했기 때문이다. 실제 피해자들을 만나 면밀한 인터뷰를 진행한 것은 물론 교구와 주고받은 편지글을 인용하는가 하면 극영화지만 다큐멘터리처럼 구체적인 팩트도 놓치지 않았다. 또한 프레나 신부의 실명을 사용해 사실감을 높이는 반면 수치스러움은 더했다.

아이 다섯의 아버지 알렉상드르(멜빌 푸포)는 오늘 중대발표를 하려 한다. 어릴 적 자신은 교회에서 성추행 당했고, 그 사람을 고발한다는 내용이다. 결심한 계기는 프레나 신부가 다시 복직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 충격적인 이야기는 아이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진다. 아버지는 말한다. “너희도 말하는 걸 두려워하지 말거라”. 진실은 언제 어디서든 밝혀지게 되어 있고 희생이 따르겠지만 제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장면이다. 아버지와 남편의 고백, 한국이었으면 피해자 스스로 사건을 입에 올릴 수도 없으며 평생 혼자 감내해야 할 수치일 뿐이다. 아무리 가족이라도 주변의 시선을 피해 마음으로 품어줄 여력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금 프랑스의 성숙한 의식에 감탄하게 된다.

프레나 신부(버나드 베를리)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혐의를 인정한다. 다만 나는 병에 걸렸을 뿐이다.” 죄를 물으려는 사람, 사과를 받고 싶은 사람을 맥 빠지게 만드는 대답이다. 그것도 한없이 병약한 노인의 얼굴을 하고 뻔뻔하게. 본인은 끝까지 죄를 뉘우치기보다 환자라는 주장에 가깝다. 마치 대기업 회장들이 휠체어에 탄 채 담요를 덮고 나오는 장면과 오버랩된다.

하지만 알렉상드르 사건의 공소시효는 만료되었고, 다른 피해자를 수소문한 끝에 ‘프랑수아(드니 메노셰)’를 만나게 된다. 꺼진 불씨를 살려 타오르게 하는 생생한 증언들이 되살아난다. 이에 탄력 받아 다음 타자가 숨을 불어 넣는 작업이 계속된다. 이들의 마음은 한결같다. 다시는 나와 같은 피해자가 다시는 생기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과 프레나 신부의 처벌이다.

프랑수아는 미디어를 빌어 폭로하고 ‘라 파롤 리베레(해방된 목소리)’라는 단체를 만들어 적극적으로 대응한다. 많은 사람들이 나도 당했다며 진술하기 시작했다. ‘너는 혼자가 아니야, 우리는 함께야’라는 연대감이 커진다. 그렇게 단체는 공소 시효가 남아 있는 또 다른 피해자를 찾아 나선다.

‘에마뉘엘(스완 아르라우드)’은 영화의 마지막에 등장해 긴장감과 안타까움을 동시에 만드는 인물이다. 불우한 가정사 때문에 심각한 학대를 받게 되었고 신체적 변화까지 겪었기 때문이다. 결국 가장 심각한 트라우마로 남은 에마뉘엘까지 힘을 보태며 영화는 클라이막스를 향해 간다.

한 신부의 장난질에 수많은 아이들이 짓밟혔고 신앙이 흔들렸다. 유년기에 받았던 상처를 애써 숨기고 살았지만 서로의 아픔을 공유하고 위로받고 힘을 합쳐나간다.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도 함께하면 해낼 수 있다는 연결의 중요성이 커진다. 모두가 고통 속에서 지난 세월을 속절없이 보냈다. 인생이 완전히 망가진 사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듯한 가정을 이루고 보란 듯이 잘 살고 있는 사람. 각자의 방법으로 이겨내고 있을 뿐 씻은 듯이 나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교구는 이런 말을 한다. ‘신의 은총으로 공소시효가 지났습니다’라고. 이 말은 ‘신의 은총이 있어 다행이다’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교구의 흠을 덮으려고만 하는 집단의 이기심과 폭력성이 여과 없이 드러난다.

영화 <신의 은총으로>는 관행처럼 여겨지는 가톨릭계의 부패를 들추고 있다. 가톨릭 보스턴 교구 사제들의 성범죄를 취재해 들춰낸 바 있는 <스포트라이트>와 다른 점이라면 피해자 당사자들이 직접 나선다는 데 있다. 항상 가장 논쟁적인 작품의 중심에 서있는 ‘프랑소와 오종’ 감독의 첫 실화 영화면서도 지금까지 작품들과 결이 다른 영화다. 취향의 호불호는 갈릴 수 있으나 메시지의 영향력은 한 방향이 아닐까 짐작한다.

카메라는 시종일관 피해자를 건조하고 담담하게 바라본다. 프레임 안에서 분노하기보다 차분히 대응하고, 자극적인 장면을 피함으로써 극대화되는 폭력을 마주하도록 구상했다.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보여준 것보다 더욱 큰 반향을 이루는 효과라 할 수 있다. 그들을 마냥 도와주어야 하는 약자로 그려내지 않은 점도 눈여겨볼만하다. 바위로 계란을 치기는 가능하다. 끊어지지 않는 단단한 침묵의 사슬이 어떻게 해체될 수 있는지 영화는 증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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